[국민일보][이 땅의 희망지기-벤 토레이 신부] “교회가 서로 사랑하는 모습 보여줘야 통일 후 하나 될 수 있어”
“남북통일을 위해 가장 중요한 준비가 뭔지 아세요? 한국교회가 하나 되는 겁니다.”
의외였다. 수도원의 은자(隱者)라고 생각했는데 대뜸 남북통일을 끄집어냈다.
개신교 초교파 영성훈련원인 예수원 대표 벤 토레이(63) 신부는 지난 21일 기자를 만나자마자 통일 이야기로 말문을 열었다. 그런데 그가 펼치는 통일에 관한 지론이 남달랐다. 한국교회의 분열 극복이 남북통일의 전제조건이라고 했다. 한국교회를 말할 때는 강원도 태백의 산골짜기 수도원에서 온 성직자가 아닌 세상을 향해 일갈하는 선지자의 모습이었다. 인터뷰 내내 그는 한국교회부터 하나가 돼야 북한선교가 가능할 뿐 아니라 통일한국이 성경적 세계관 안에서 새롭게 갱신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세미나 참석차 서울에 올라온 그를 서울 충신동 선교사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났다.
“지금처럼 분열된 한국교회로는 북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보여줄 수 없어요. 오히려 우리 죄만 보여주겠지요. 교회가 먼저 서로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남북한 사람들도 하나 될 수 있습니다.”
4대째 선교사 집안에서 태어난 토레이 신부는 2005년 아내와 함께 예수원에 정착했다. 당시 그의 나이 55세. 미국에서 IT 전문가와 교육자의 삶을 살던 그가 다소 늦은 나이에 태백에 온 것은 다름 아닌 ‘남북통일’ ‘북한선교’를 위해서다. 2003년부터 지금까지 10여년간 통일 운동을 했다.
푸른 눈에 넉넉한 풍채를 지닌 그는 한국에서 다소 생소한 미국 동방교회 소속 신부(神父)다. 아버지인 대천덕(루빈 아처 토레이) 성공회 신부와는 다른 교파에 몸담은 셈이다. 교회 초교파 연합의 원리를 가족이 몸소 실천하고 있는 셈이다.
“아버지는 성공회 신부, 할아버지는 장로교 목사, 증조할아버지는 회중교 목사예요. 몇 년 전 토레이 가문 모임이 있었는데, 53명의 자손 대부분이 교회에서 사역을 하더군요. 놀라운 건 그 가운데 침례교부터 천주교까지 다양하게 있었다는 거지요. 하지만 우리는 다투지 않아요. 교파가 어떻든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자손이니까요.”
뜻 모를 울음
1950년 미국에서 태어난 그는 예수원을 건립한 고 대천덕 신부와 고 현재인(제인 그레이 토레이) 사모를 따라 8세 때 한국으로 처음 왔다. 그때부터 미국의 대학에 진학할 때까지 10대 시절을 아버지가 세운 예수원에서 공동체 청년들과 함께 살았다. 하지만 한국에 정착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과학자가 되고 싶었던 그는 69년 대학 진학을 위해 미국으로 돌아갔다. 72년 사라 로렌스 대학을 졸업한 후 79년부터 에트나 생명보험회사와 앤더슨컨설팅 회사에서 각각 컴퓨터 프로그래머와 시스템 개발자로 일했다. 94년부터는 코네티컷주에 미션스쿨인 킹스스쿨을 설립해 이사장과 학장을 지내기도 했다. 78년 1년간 예수원에서 살며 수련자 과정을 거치긴 했지만 그때도 한국에서 계속 살 생각은 없었다.
그러던 그가 하나님의 소명을 알게 된 것은 52세이던 2002년. 대 신부의 소천으로 장례식장을 지키던 그에게 부모님의 오랜 벗이었던 한 집사님이 찾아왔다. 손님이 많아 현 사모를 찾을 수 없으니 대신 말을 전해 달라는 부탁을 하기 위해서였다.
“창세기 2장을 묵상하면서 느꼈던 소감을 어머니께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에덴동산에는 흐르는 강이 4개 있는데 삼수령엔 강이 3개밖에 없다’고요. 이곳이 한강, 낙동강, 오십천의 발원지라 ‘삼수령(三水嶺)’이라 불리거든요. 이 말을 듣자마자 저는 집사님의 의중을 이해했어요. ‘예수원에 네 번째 강이 필요하다는 것이로구나.’ 그 강은 북쪽을 향하는 생명수를 뜻하는 것으로 북한과 통일에 관련된 사역을 말씀하시는 것이었고요.”
예전부터 그는 아버지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통일을 준비하는 세대를 육성하기 위해 수련원 설립을 놓고 20여년간 기도했던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는 현 사모에게 전화로 ‘네 번째 강’에 대한 이야기를 전했다. 그리고 곧 미국으로 돌아갔다.
이후 토레이 신부에게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평범한 일상에서 북한의 어려운 상황이 자주 겹쳐 보이면서 눈물을 쏟기 시작한 것이다. 그가 학장으로 있는 학교 채플시간에 설교를 들어도, 운전하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듣다가도 북한이 생각나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이런 일이 일주일 동안 여러 번 반복됐다.
“그 당시 북한을 생각하며 얼마나 자주 울었던지 제 자신이 우울증이 아닌가 의심할 정도였습니다. 아무 이유 없이 북한 수용소나 어려운 경제상황 등이 자주 생각나고 우는 일을 반복하다 보니 아버지 장례식 때 들었던 ‘네 번째 강’이 비로소 기억나더군요. 이때부터 하나님의 뜻을 놓고 아내와 주변 사람들과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원에서 남북한 통일을 위해 일하는 것이 당신의 뜻이라면 제가 하겠다고요.”
“북한은 곧 개방되지만 한국교회는…”
토레이 신부가 예수원에 오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기도로 들은 성령의 음성 때문이었다. 북한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52년간 북한과 무관한 삶을 살아온 자신이 왜 남북통일 준비를 해야 하는지 쉽게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조언을 떠올렸다. ‘나(부모)를 따라가지 말라. 오직 성령님만 따라가라. 그의 부르심대로 해라.’ 성령의 인도를 구하며 기도에 전념하던 그의 마음속에 음성이 들렸다. 두 마디였다. ‘북한은 곧 개방된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준비가 안 돼 있다.’
“하나님의 기준에서 곧(soon)이 얼마인지는 모르겠지만 북한이 개방된다니. 놀라웠지만 한편으론 정말 그렇게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독일 베를린 장벽과 소련이 붕괴된 걸 보면 충분히 예측 가능한 일입니다. 문제는 한국교회가 준비되지 않았다는 거였지요. 60년간 다른 길을 걸었지만 한민족이고 같은 언어를 쓰니까 준비 없이도 문제될 게 없다는 분들이 남한뿐 아니라 북한에도 많았어요. 속으로 많이 놀랐습니다. 러시아가 개방됐을 때 선교사들이 많이 들어갔지만 얼마 후에 다시 나온 일을 반면교사 삼아야 해요. 준비하지 않으면 한국교회도 같은 전철을 밟을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북한 개방의 때를 준비하겠다는 결심을 세운 토레이 신부는 2003년 예수원 공동체에 합류할 뜻을 밝혔다. 예수원은 그를 대 신부의 후임자로 여겨 삼수령센터 본부장으로 임명했다. 당시 미국에서 청소년 수련원과 기독 대안학교인 생명의강 학교 설립에 관여했던 그는 본격적으로 일을 하기 위해 2005년 한국으로 다시 옮겨왔다.
예수원에 아내와 터를 잡은 그는 ‘네 번째 강 계획’이란 이름으로 북한 개방에 대비한 준비를 시작했다. 특히 그는 기독교 세계관을 바탕으로 북한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다음 세대에 통일한국을 위한 성경적 토지법과 노동관을 가르치는 데 주력했다.
그는 2004∼2005년 예수원에 북한학교를 열어 북한의 사회·문화를 알리고 학생들과 선교 전략을 공유했다. 2006년부터는 매년 여름마다 3주간 노동학교를 열어 성경적 노동에 대해 강의했다. 또 북한 개방 이후 차세대 지도자를 육성키 위해 2010년 예수원 앞 폐교를 빌려 기독 대안학교인 생명의강 학교를 시작했다.
75년부터 공동체 기업으로 운영되던 삼수령 목장은 향후 북한 개방 이후를 연구하는 삼수령 센터와 공동체 마을, 청소년 수련원 터로 사용된다. 지난해 예수원은 산림청으로부터 그간의 숙원사업이던 목장 터 건축허가를 받았다.
“목장은 산림청 땅을 예수원이 임차해 운영하던 것이라 마음대로 건축을 할 수 없었어요. 아버지는 삼수령에 남북한과 한국교회 통일을 위한 센터를 세우길 원하셨기에 99년부터 태백시 민자유치사업 중 청소년 수련단지 사업에 참여했습니다. 지역 개발을 위해 추진된 일인 만큼 실시계획을 크게 해야만 했어요. 청소년 수련원뿐 아니라 2개의 공동체 마을 조성, 학교, 교육관 등을 짓기로 했는데 총 270억원이 들더군요. 너무 큰 돈이라 우선은 학교와 식당, 숙소 건물비용인 53억원을 준비하는 일에 집중하고 있어요.”
마음만 하나가 된다면
토레이 신부에겐 아버지로부터 40여년간 배워왔던 ‘믿음 재정’의 원칙이 있었다. 필요한 것을 믿음으로 구하는 방법에 익숙했던 그는 200억원대의 자금을 놓고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다.
“저는 하나님과 삶 속에서 대화하듯 기도합니다. 어느 날 아침, ‘하나님, 저희 돈 굉장히 많이 필요합니다’라고 기도했더니 마음속에 강하게 음성이 들려요. ‘내게 돈을 달라고 하지 마라! 너는 내 일꾼이니 필요한 걸 다 주겠다. 하지만 돈은 구하지 마라.’ 졸지에 전 다른 사람들에게 찾아가 협조를 구해도 하나님께 재정을 위해 기도할 수 없는 신세가 돼 버렸지요.”
이어 그의 마음속에 다시 한 번 강하게 음성이 들렸다. 통일을 위해 기도하기 전 한국교회의 분열을 놓고 기도하라는 내용이었다. 교회의 분열은 하나님의 뜻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일인데, 이를 덮어놓고 나라의 통일만 외친다면 이율배반적이라는 것이다.
이때부터 토레이 신부는 모금을 위해 다양한 사람을 만나는 한편 한국교회의 연합을 위해 기도했다. 남북통일과 북한선교보다 먼저 한국교회가 하나 되길 원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모금을 하면 할수록 한국교회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중요한 일인지 새삼 느껴요. 재력가 한 분이나 한 대형교회와 같이 진행했으면 금방 모금 목표 달성했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개교회와 교파를 넘어 한국교회가 힘을 모아 삼수령 공동체 마을을 짓기 원합니다. 건축이란 실제적인 일을 하면서 마음을 하나로 모으려 합니다. 어렵지만 이게 하나님의 뜻이라 믿습니다.”
그는 한국교회가 마음만 하나로 모은다면 모든 일은 다 해결될 수 있다고 봤다. 모든 것에는 삼수령 공동체 건축뿐 아니라 통일과 북한선교도 포함된다.
“누군가 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언제든 돈 주실 수 있고, 북한 개방할 수 있어요. 그런데 왜 그렇게 안 하시는지를 깊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곧 때가 오는데, 교회가 빨리 서로 용서하고 한마음이 돼야 해요. 교회가 협력하는 모습을 보여야 세상도 움직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선 사람의 마음이 움직여야 하는 거지요.”
토레이 신부는 교회뿐 아니라 한국 사회도 분열로 몸살을 앓고 있다고 진단했다. 요즘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는 지역 갈등, 세대 분열, 빈부 격차 모두 하나 되지 못한 마음 때문이라는 것이다. 무엇보다 그는 교회와 세상이 차이가 없다는 데 가슴이 아프다고 했다.
“이혼, 가족 분열, 낙태… 사회문제가 모두 교회에 들어왔어요. 하나님께서 마음 아파하실 일들입니다. 통일 전에 남한 사회부터 하나가 돼야 해요. 사회가 하나 되기 전에 교회부터 하나가 돼야 하고요. 교회가 하나 되면 그 영향이 사회에 미칩니다. 사회 갈등이 해결되면 나라가 회복될 것이고요. 그렇지 않으면 소망이 없습니다. 저는 이를 위해 계속 기도할 것입니다. 지난 47년간 예수원이 한국을 위해 기도한 것처럼요.”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06839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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